LJ칼럼 : 삼일절을 돌아보다 -1-

LJ칼럼:삼일절 을 돌아보다
부제 : 한번 누나는 영원한 누나!!


 


 3월1일.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날인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이다. ([출처] 3·1절 [三一節 ] | 네이버 백과사전 )
 하지만 20세기 오늘날 사람들은,
3월1일 그저 그런 "일요일"과 같은 "공휴일"이라 생각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것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워....
나라도 기억하고자, 한번이라도 더 새기고자 글을 쓴다.


삼일절의 역사적 의의


1. 3.1운동의 의의
 
 1910년 일제강점기의 모진 수탈과 강탈에서 해방되고자 전민족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주먹구구식의 독립운동이 아닌 체계적이고 대중적이라 평가받고있으며, 독립운동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대한민국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이 조직되어 무장독립전쟁을 전개하게되며 우리 민족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준다. 이러한 3.1운동 정신은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정부는 이날은 삼일절로 정하여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일제는 강점기 시절 정치, 사회, 교육를 비롯한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장악한다. 한국은 아무것도 할수없었던 그실절 쌓이고 싸였던 반일감정이 폭발하여 발생한 운동이 3.1운동이다.

3. 삼일운동의 전개과정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한 학생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우렁찬 만세 소리는 서울의 경우, 며칠동안 일제가 전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만세 소리 는 전국 218개군 가운데 211개군으로 불길처럼 퍼져갔다. 이런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반죽음이 된채 재 판에 회부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재판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없는 우리 동포를 수 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 을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 치워라!" 하고 떳떳이 주장하다가 7년의 징 역형을 받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1920년 17세 나이로 굶 주림과 병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관순 열사 (1902∼1920)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 충청남도 천안출신.
아버지는 중권, 어머니는 이씨이며, 5남매 중 둘째 딸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게 되는데, 그때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 · 김구응 등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병천)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이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3.1절을 그냥 단순한 공휴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
만세를 부르다 숨진 수많은 "열사"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현대의 우리에게 애국심은 멀어진 단어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지금 이자리에 있게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